그들 속의 나 


- 도종환



길을 걷다 이십년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나는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삼십년 전 또는 그보다 더

기구한 시절에 만났던 사람도 보게 된다


살아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 중에도

어느 시절 어느 한때 만났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방황하던 시절 얼굴을 덮던

긴 머리칼에 묻혀간 내 젊은날을

기억하는 이 있을 것이다


절망에 그늘진 눈매와

내 뒤에 버티고 섰던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

상처받은 짐승이 되어 울부짓던 몸짓들을

충격처럼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고요한 아침에 나를 만났던 이도 있고

광기의 밤과 흔들리는 횃불 아래서 

나를 만났던 이도 있을 것이다


감사와 기쁨으로 손잡았던 이도 있고

편견과 미움으로 나를 보았던 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나를 만났던 이는 어땠을까

한낮의 햇살 속에서 꽃길 거닐 때 

나를 만난 사람은 어떠했을까


바람 부는 세월의 바다에서 또 몇십년

파도와 뱃전이 되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의 얼굴 하나의 표정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파도처럼 솟았다 물방울처럼 흩어진

수많은 나여 모든 나여



-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창비시선 177 (창비, 1998),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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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전화


- 도종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비린 것을 눌러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창비시선 177 (창비, 1998),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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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사랑


- 도종환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 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낯선 섬의

감탕밭에 묶여 있는 시간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에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창비시선 177 (창비, 1998),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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